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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지남재중건기(芝南齋重建記)
芝南齋重建記 玉川之北芝山之南高四尺而禮封者非吾先祖農隱先生萬年幽宅乎數歩而下翼然而閣者非吾子孫歲時齋沐之所乎淳昌之論名穴者皆以趙氏都先山稱之嗚呼休矣盖玉川氏自有姓以來以上三世墳墓未詳焉諱元吉字聖中諡忠獻高麗門下侍中璋曾孫版圖判書洪珪孫生員文科 贈大匡輔國光祿大夫玉川府院君佺子身爲府院君盡忠恭讓協志圃冶以樂齋虔谷光陽節制爲子以司正生員參議節愍爲孫院宇享之子孫保之猗歟盛哉自是厥後繼繼承承道學文章焜燿簡策忠孝節義代不乏人爲東方巨族者久矣是以子孫齋沐之所無不畢具而其麗不億難以收容故闔宗慨然不己乃大規模美材木而新之半一年而竣功比於舊制十倍優勝亦子孫寝食從此豁如豈非幸也哉當時效誠者光枓警鐸喜善也噫吾家世德先輩尚論己定無容更覷而登斯齋者甞思其嗜思其好如將見之焉則陟降精靈必曰余有後不棄基矣夫安得不敬乎又所可勉者勿以吾事己了而忽之善繼善述百世如一日是所加額以竣玆庸畧草如右倘免僣越也否 歲戊申春三月 日 二十世孫 東勲 謹撰 지남재중건기(芝南齋重建記) 옥천(玉川)의 북 지산(芝山)의 남쪽에 높이 四척의 예장으로 봉한 산소는 우리 선조 농은(農隱) 조 선생의 만 년(幽宅)이 아니겠으며 두어 걸음 아래에 높이 솟은 재각은 우리 자손이 묘사 때에 재계하고 목욕하는 곳이 아닌가. 순창(淳昌)에서 이름난 자리를 말한 자는 모두 조씨의 도선산이라고 하니 아 아름답다 대개 옥천조씨가 성을 가진 이래로 이상 三세는 묘소를 실전하였고 휘 원길(元吉), 자 성중(聖中), 시 충헌(忠獻)은 고려(高麗) 문하시중(門下侍中) 장(璋)의 증손이요, 판도판서(版圖判書) 홍규(洪珪)의 손자며, 贈大匡輔國光祿大夫 玉川府院君 전(佺)의 아들로 자신 또한 부원군이 되어 공양왕(恭讓王)에 충성을 다하고 포은(圃隱)과 목은(牧隱)과 더불어 뜻을 같이 하였으며 요재(樂齋), 건곡(虔谷), 광양(光陽), 절제(節制)는 아들이요, 사정(司正), 생원(生員), 참의(參議), 절민(節愍)은 손자로 사우(祠宇)에 배향하고 자손이 진진하니 거룩하고 성대하도다. 이로부터 그 뒤에 계승하여 도학과 문장이 역사책에 환히 빛나고 충효와 절의가 대대로 끊기지 아니하여 동방에 거족(巨族)이 된 지가 오래였다. 이러므로 자손이 재계하고 목욕할 재각을 다 갖추지 아니함이 없으나 그 수효가 억으로 헤아릴 수 없으므로 수용하기가 어려워 제종이 중건하기로 합의하고 자재를 모아 기공한지 一년이 채 못되어 준공하니 옛 제도에 비하여 열 배나 났고 또 자손의 재숙(齋宿)이 이로부터 염려가 없게 되었으니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당시에 수고한 자는 광두(光枓), 경탁(警鐸), 희선(喜善)이었다. 아! 우리집 세덕은 선배의 의논이 이미 정해졌으므로 다시 더 보탤 것은 없고 이재에 온 자손이 선조의 즐겨하고 좋아하신 것을 생각하고 함께 보신것 같이 한다면 오르고 내린 맑은 신령이 반드시 내 후손이 있어 터를 버리지 아니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실 것이니 어찌 공경하지 아니하겠는가. 또 가히 힘쓸것은 우리 일을 다 마쳤다 하지 말고 잘이어가고 착실히 기술하여 백세를 하루같이 하면 이것이 선영을 추모한 지극한 정성이 될 것이다. 이에 위와같이 대략 초하니 혹 참월함이 없을런지 모르겠다. 二十世孫 東勲 삼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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